목(3/24) (고전9) 넷째날(세족 목요일) 막14:32-42 “겟세마네의 기도”
찬송가 510 겟세마네 동산에
– 말씀요약
: 제자들과의 유월절 식사를 마치시고 나서 예수님께서는 고난 받고 죽으실 것과 제자들이 다 버리고 흩어질 것, 그리고 베드로가 세번이나 예수님을 부인할 것까지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나서 제자들을 데리고 겟세마네에 이르러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 만을 데리고 기도하러 올라 가셨습니다. 세 제자들과 조금 떨어지신 곳에서 기도하셨는데 이 때의 기도는 다른때와는 달랐습니다. 예수님의 마음이 심히 고민하여 죽게 된 심정으로 하시는 기도였습니다. 마치 겟세마네의 이름처럼 기름을 쥐어 짜듯 혼신을 다해 아버지 하나님께 간구하는 기도였습니다. “아버지께는 모든 것이 가능하오니 이 잔을 내게서 옮기시옵소서” 그러나 “나의 원대로 마시옵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 이 기도는 결코 잔을 피하시기 위한 기도가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기 위한 기도였습니다. 세 번에 걸쳐서 고난의 잔을 받으시기 위한 기도를 드리신 것입니다. 인간의 육신을 입고 이 땅에 오신 그리스도로서 고통과 아픔의 자리에서도 대속을 위한 하나님의 뜻을 끝까지 이루시기 위한 기도를 드리신 것입니다. 고통이 없는 십자가가 아니라 죄 없으신 분이시기에 그 이상의 고통의 십자가를 지셔야 하기에 하나님을 의지하시는 기도였습니다. 이 겟세마네에서의 기도가 십자가에서의 승리를 이미 예고하신 것입니다.
반면에 안타깝게도 베드로를 비롯한 세 제자들은 이러한 위기의 상황에서 기도하지 못하고 잠이 들었습니다. 육신이 얼마나 피곤했으면 함께 깨어 기도하자 하신 예수님의 간청도 지키지 못하고 잠이 들었을까 생각해 봅니다. 죽을 지경으로 땀방울이 핏방울이 되도록(다른 복음서 기록) 예수님은 기도하고 계신데 육신의 피곤을 이기지 못한 것입니다. 밀려오는 졸음을 피할 방도가 없습니다. 그만큼 사람은 육신에 약합니다. 육신이 의지와 생각대로 다스려지기가 매우 어렵습니다. 마음이 없어서가 아니라 육신이 말을 듣지 않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도 이해 하셨습니다. 얼마든지 이해할 수 있는 일이라 여겨질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다가오는 위기의 상황을 두고 기도하지 못한 제자들은 어떻게 되었습니까? 다 줄행랑을 치고 말았습니다. 베드로는 세번 예수님을 모른다고 부인했습니다. 예수님이 부활하셔서 나타나실때까지 절망과 두려움에서 헤어 나오지 못하였습니다. 기도해야 할때에 기도하지 못해 실패하고 말았습니다. 잠시 육신의 피곤함에 눌려서 그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소중한 분을 잃어 버린 것입니다. 그런데 만일 예수님의 마음을 알고 의지를 세워 함께 깨어 기도할 수 있었다면 어땠을까요? 결국 “깨어 있어 기도하라”는 권면은 예수님을 위한 기도가 아니라 제자들 자신들을 위한 기도였고 기도했었어야 함을 후에야 깨닫게 된 것입니다.
– 십자가 묵상
: 주님의 제자로 고난과 위기–십자가의 길을 가기 위해서는 기도해야 합니다. 무엇을?
1.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기를 위해
2. 우리의 연약한 육신이 시험에 빠지지 않도록
3. 때를 분별하기 위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