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욥은 이제 세상에서 악인들의 형통함을 들어서 친구들의 주장에 반박합니다. 고난이 악한 일들에 대한 보응이라면, “어찌하여 악인이 살고 수를 누리고 세력이 강하냐… 그 집이 평안하여 두려움이 없고 하나님의 매가 그 위에 임하지 아니하며… 그날을 형통하게 지내다가 경각간에 음부에 내려가느니라…” 이런 일이 있을 수 있는가? 묻습니다. 심지어 그들은 “전능자가 누구기에 우리가 섬기며 우리가 그에게 기도한들 무슨 이익을 얻으랴 하는구나” 하며 하나님을 인정하지도 않는 자들인데 어떻게 진노의 불이 바로 떨어지지 않는가? 반박합니다. 한마디로 알 수는 없지만 “어떤 사람은 죽도록 기운이 충실하여 평강하며 안일하고… 어떤 사람은 죽도록 마음에 고통하고 복을 맛보지 못하였어도” 다만 죽음만이 공평한 현실을 근거로 주장합니다. 그러므로 세상에서 받는 고난으로 악인과 의인을 판단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오히려 세상에서의 형통함이 “멸망의 날을 기다리움이 되고 멸망의 날을 맞으러 끌려 나감이 된다” 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세상 일들이 잘되고 형통하다고 해서 하나님이 복을 주시는 것으로 착각해서는 절대로 안됩니다. 또한 반대로 열심히 성실히 살아가려고 하는데 일이 꼬이고 자꾸 어려움이 찾아 온다고 해서 하나님이 벌을 주시는 것이라 여겨서도 안됩니다. 대신에 어떤 일을 계획하고 진행해 나갈때에도 ‘주님을 따르는 자의 삶의 양식’으로 해야 합니다. 세상적인 방법보다는 먼저 하나님의 뜻을 기도로 묻고, 세상의 성공이 아닌 주님의 길의 성공을 최종 목표로 정하고 실행해 나가는 것입니다. 그럴때 하나님이 인정하시는 “형통함” 이 우리의 인생을 통하여 이루어지게 될 것입니다.
오늘 이러한 “형통함”이 주시는 기쁨과 보람을 맛보게 하소서. “복 있는 사람은 악인의 꾀를 좇지 아니하며 죄인의 길에 서지 아니하며 오만한 자의 자리에 앉지 아니하고…”